본문말씀고후3:1-18 외울말씀고후3:6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들어가기 바울은 새 언약의 일꾼으로 부름 받아 고린도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생겼고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어떤 이들처럼 스스로를 천거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성도들이 바로 바울이 행한 사역의 산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출애굽기 34:29-35에 언급된 장면을 끌어와 새 언약의 우월성을 증명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모세의 얼굴에 있었던 광채는 사라질 것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영광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영원한 영광을 전하는 새 언약의 일꾼으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1.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비롯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자격을 주셨습니까? (6절)
고린도후서 3장 6절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정답) 새 언약의 일꾼
설명) 새 언약은 옛 언약의 갱신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속죄의 방법을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옛 언약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래서 새 언약은 ‘영원한 언약’ (사 55:3), ‘화평의 언약’ (겔 34:25), 생명과 평강의 언약 (말 2:5) 이라고도 불립니다.
먼저 옛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신 후에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해 그들과 맺으신 언약을 가리키는데 광범위하게는 구약 전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언약의 골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언약을 지키면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어 주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당신의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며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출 19:5,6) 하지만 이 첫 언약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인해 깨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히 7:11, 8: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옛 언약을 능가하는 완전한 언약을 세우셨고 그 근거로 이 땅에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면서 새 언약의 근거인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을 믿고 그분을 마음 속에 영접하는 모든 자에게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라히리라‘ (히 8:12)는 언약과 함께 영적 이스라엘이라는 특전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이스라엘인 성도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거나 죄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그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즉 이 말은 그가 새 언약의 일군이 된 것이 자신의 인간적이 노력이나 소망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셨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 사명을 감당할 능력과 은사를 성령을 통해서 충만하게 채워 주셨다는 뜻입니다.
2. 모세보다 나은 직분인 영(성령)의 직분, 의의 직분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영광은 어떻게 됩니까?(8-11절)
고린도후서 3장 8~11절 8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10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11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정답) 더 큰 영광을 지님.
설명) 바울은 ’영의 직분의 영광이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의 영광을 능가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의문의 직분자’의 대표로 모세를 언급하면서 모세가 십계명이 새겨진 두 개의 돌판을 가지고 시내 산에서 내려와 그것을 백성들에게 선포하였던 장면을 인용하였습니다. (출 34:29~35)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얼굴에서 나오는 광채를 보면서 그에게 나아오기를 두려워하였기에 모세는 수건을 자기의 얼굴을 가렸습니다. 이처럼 인간을 정죄하는 ‘율법조문의 직분’에도 일시적이긴 했지만 엄청난 영광이 있었는데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은혜와 생명을 선포하는 ‘영의 직분’은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는가! 이것이 바로 바울의 주장입니다. ‘영의 직분’의 영광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영광이며 거기에서 비추는 광채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으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의 빛이며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과 생명을 가져 다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 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날 성도들은 구약의 성도들보다 더욱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영적으로 무지한 자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습니까? 이들에게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접하게 해주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영광되었던 것이 영광 될 것이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영광되었던 것보다 더 큰 영광이 출현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영광되었던 것은 정죄의 직분을 가리키며 더 큰 영광은 의의 직분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정죄의 직분이 의의 직분에 압도당하는 까닭은 의의 직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것인 반면 정죄의 직분은 사라져 가는 임시적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3. 바울은 모세를 하늘처럼 떠받드는 사람들 앞에서 모세의 영광을 장차 없어질 것이라고 낮추어 말했습니다. (13절) 바울이 그처럼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 (12절)
고린도후서 3장 13절 12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정답) 새 언약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
설명) 바울이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12절) 바울과 그 동역자들이 담대히 외칠 수 있는 이유는 12절에서 ’이 같은 소망‘은 4절에서부터 언급한 새 언약의 탁월성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담대함은 인간적인 장점 곧 화술이나 재물, 배경 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복음에 대한 분명한 확신에서 기인되었습니다. 이 담대함은 말을 함에 있어서 솔직함, 두려움 없는 정직함을 뜻할 뿐만 아니라 행동에 있어서도 솔직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앞에서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 증거자에게 가장 먼저 요구되는 사항은 ’새 언약에 대한 확신‘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요구되는데 그 이유는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만 담대한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3절에서는 바울은 모세가 수건을 쓴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모세가 수건을 얼굴에 섰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장차 없어질 것’이란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마다 일시적으로 지속된 얼굴의 광채를 의미합니다. 이 광채는 영원히 지속되지 않고 하나님을 떠날 때에 점점 희미해져서 마침내는 사라졌기 때문에 모세는 그 사라지는 광채를 수건을 써서 가렸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복음 전도자들도 수건을 쓸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당당히 그 영광을 드러내며 그리스도의 의를 세상에 전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또한 전해야 합니다.
4.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 거하는 자에게는 무엇이 있습니까? (16-17절)
고린도후서 3장 16~17절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정답) 자유함 (죄와 사망으로부터 영적 해방을 누린다.)
설명) 모세의 수건 즉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영적 무지는 주께로 돌아가면 벗어집니다. ‘돌아가며’이란 말 속에는 돌이키다 회개하다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돌아가며’이란 그리스도에 대한 불신앙을 모두 내버리고 전인격적으로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영접하는 적극적인 회개의 자세를 의미합니다. 그럴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마음 속에 거하시게 되고 그의 마음을 덜고 있던 무지와 오해 불신앙을 상징하는 모세의 수건을 자연히 벗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율법을 완전케 하기 위해서 오신 분으로 주께로 돌아오는 자는 누구든지 그분 안에서 율법이 종결되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영적 무지와 오해 불신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는 길뿐임을 알게 됩니다.
17절에서는 우리 마음에 주의 영을 모실 때 무엇이 찾아오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유입니다. 이 자유는 육체의 자유가 아니라 율법의 멍에로부터의 영혼의 자유이며 해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영혼의 자유를 우리들에게 주시기 위해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는 너무나도 큰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더 이상 율법의 종 노릇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입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적인 자유를 외치면서도 생활은 율법으로 돌아가며 권위주의에 빠져서 하나님의 은혜보다 교회 의식에 치중하는 일부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은 자유자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다시 율법의 멍에 아래 자신을 종속시키는 종의 모습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감화를 받아 진리를 깨닫는 자는,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 죄와 사망으로부터 영적 해방을 누립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죄로부터의 해방과 더불어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되려는 헛된 시도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이 자유는 그리스도인이 누리게 되는 구원 경험을 적절히 묘사를 표현합니다.
5.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어떤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까?(18절)
고린도후서 3장 18절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정답) 영광에 영광에 이른다. (그리스도를 닮는 자로 변하게 됨)
설명) 이 구절에서 ‘우리’는 바울과 다른 사도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알게 된 모든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수건을 얼굴에 두르고 거울을 본다고 생각해 보세요. 희미하게 보이거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수건을 벗고 거울을 보면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새 언약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또렷이 본 자들입니다.
‘거울을 보는 것 같이’라는 말은 ‘거울처럼 비추다’라는 뜻입니다. 새 언약 가운데 살고 있는 성도는 수건으로 덮인 마음을 가지고 아직도 율법을 읽고 있는 유대인들과는 달리 벗은 얼굴로 복음의 거울 속에 비춰지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본 결과 성도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는 ‘영광된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하는 ‘영광된 몸으로’, 즉 한층 더 영광스러운 위치로 진전하게 됩니다.
이런 변화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일어나는데 욕망, 죽음, 질병, 고난 등에 무방비 상태로 놓여 있던 성도의 ‘낮은 몸’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의 형체’로 변화하게 될 것을 가리킵니다.
이와같이 성도가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하게 되는 놀라운 일은 율법이나 철학, 선행 등의 결과가 아니라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복음의 거울 속에 비춰진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연습을 꾸준히 해야 할 것이며, 또한 성령의 인도를 받는데 게으르거나 인색함이 없어야 합니다.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그리스도는 영원히 쇠하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데서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를 닮는 자로 변하게 됩니다. 점진적인 변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온전히 이루는 데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생각하기>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평신도 운동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대부분 교역자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즉 기독교 사역은 신학 훈련을 받고 안수 받은 목사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실정입니다. 사회적인 전문화 현상이 교회에도 스며들어 전문 사역자가 아닌 대다수의 평신도들은 자신에게 어떤 사역 능력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바울과 같이 우리는 “이런 일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2:16)라고 묻곤 합니다. 이 장에서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격 있는 사역자인 이유를 분명히 밝혀줍니다.
<적용하기> 1. 오늘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깨달음은 무엇입니까? 2. 새 언약 백성인 나에게 ‘당신은 나의 편지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나누기> 1.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생명으로 인도하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까? 2. 당신이 본문을 공부함으로써 예수님의 제자(평신도)로서 사역하는데 격려받은 바는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