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 창세기 10장까지는 창조기사와 죄의 시작 그리고 홍수의 심판에 이르기까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1장은 12장부터 시작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의 시작의 준비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바벨탑의 혼돈 중에 하나님의 선택은 아브람이었습니다. 바벨탑의 혼돈의 일은 셈을 선택하고 그의 족보를 통해 아브람에 이르게 됩니다. 혼돈스러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 교회와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일 때 사람들이 이주하며 살다가 머물러 살게 된 곳은 어디입니까?(2절)
2절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해설) 동방으로 옮겨 간 것은, 아라랏 산지에서 떠나 "시날 평지" 곧, 바벨론으로 이동한 것을 의미한다. 창세기에서 ‘동쪽’은 분리된/쫓겨나는 자가 가는 방향이기도 하고, 죄를 짓고 쫓겨가는 곳 혹은 일을 저지르기 위해 가는 곳이기도 하고, 죄를 짓고 쫓겨가는 곳 혹은 일을 저지르기 위해 가는 곳이기도 하다. 아담이 죄를 짓고 에덴의 ‘동쪽’으로 쫓겨갔다. 가인이 아벨을 살해하고 역시 ‘동쪽’으로 떠났다. 훗날 롯이 아브라함과 헤어질 때 ‘동쪽’으로 가서 소돔과 고모라 지역에 정착해 살다가 전쟁 포로가 되어 끌려가다가 아브라함에 의해 자유를 되찾았지만(14장), 다시 그곳에서 살다가 모든 것을 잃고서야 떠나게 된다(19장). 이처럼 창세기에서 동쪽은 죄 혹은 죄의 대가와 연결된 곳이다. 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먼 훗날 있을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과 연관시킨다. 바벨론이 이스라엘의 동쪽에 있었기에, 창세기에서 이미 이스라에의 바벨론 포로생활을 염두에 두고 서술함으로써 그것을 예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하면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에 입성할 때 요단 강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건너는 일과 성막의 입구가 동쪽에 있고 법궤가 안치된 지성소가 서쪽에 있었던 일도 창세기의 동쪽에 대한 이해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 어쨌든 성경에서 동쪽으로 가는 것은 별로 좋은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동쪽으로 이동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에서 멀어져 가고 있음을 뜻한다.
정답) 시날 평지에 도착하여 거기 거하게 되었다.
2. 머물러 모여 살기 시작한 사람들이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 고안한 방법은 무엇입니까?(4절)
4절 -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해설) 시날 땅에 정착한 사람들은 동쪽으로 이주하던 것을 멈추고 벽돌을 만들어 성읍과 탑을 쌓고자 했다. 그들은 ‘꼭대기가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은 탑’을 계획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 말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고 단순히 오늘날로 말하면 초고층 마천루를 짓고 싶은 시날 건축가들의 희망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하늘은 하나님의 거처이고 이들이 하나님의 ‘흩어지자’는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고유 영역을 침해하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저지른 첫 번째 죄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이와 이와 같은 큰 공사를 하게 된 목적은두 가지로 하나님을 거스렸다. (1) "이름을 내"고자 함. 인간은 자기들이 이름을 위하여 살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였으니, 그것이 실제적인 무신론(無神論)사상이다. (2)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하려 함. 하나님께서는 민족들이 각기 기질(氣質)과 재능에 의해 나뉘어 사는 것을 원하신다(행 17:26). 그러므로 전체주의는 적그리스도의 사상이다.
정답) 성읍과 탑을 높이 쌓는 것.
3. 머물러 모여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무엇을 통해 이들을 흩으십니까?(9절)
9절 -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해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온 세상으로 흩으셨다(8절). 그래서 그 이름이 바벨이 되었다고 한다(9절). 원래 ‘바벨’은 ‘혼잡하다/혼동하다’(7,9절)에서 유래한 단어로 ‘혼란’이란 뜻이다. 바벨탑이 시날 땅에 있었고(2절), 니므롯이 이곳에 바벨론을 세웠던 점(10:10) 등을 종합해 볼 때 바벨은 곧 바벨론을 두고 하는 말이다. 바벨론은 원래 아카디아어(신의 문)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창세기 저자는 이 ‘신의 문’을 ‘혼란’에 불과하다며 비하하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여러 개의 단어 중 하나가 ‘온 땅/지면’이다. ‘온 땅’은 바벨탑 이야기에서 5차례나 반복된다. ‘온 땅’이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말로 이야기가 시작된다(1절). 그들은 ‘온 땅’에 흩어지기 싫어서 탑을 쌓았다(4절). 그러나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이들을 ‘온 땅’에 흩어셨다고 2번 강조한다(8,9절). 온 땅이 같은 ‘언어’를 사용했다(1절). 언어 역시 5차례 사용되는 단어이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어떤 일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온다(사2:22). 이 사건을 통해 인간이 그들의 업적을 중심으로 단합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거부하는 죄악된 일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이 사건은 우리에게 인간이 하는 일은 실패뿐이므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 안에서 새로운 소망과 기쁨을 가지고 생활하도록 격려한다.
정답) 언어를 혼란하게 하심.
4. 데라가 70세에 낳은 자녀의 이름은 무엇입니까?(26절)
26절 -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해설) 바벨탑 사건은 벨렉 라인을 통한 셈 자손의 두 번째 계보로 연결된다(11:10-32). 욕단을 통한 셈 자손의 첫 번째 계보가 이미 제시되었는데(10:21-31), 이번에는 욕단의 형 벨렉의 자손들이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이 계보와 욕단 계보를 포함한 10장의 계보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10장의 계보들은 사람의 나이를 알려주지 않았다. 심지어 10장 마지막에 나오는 셈족 계보에도 이러한 정보가 없었다. 반면 벨렉 계보에는 각 사람들의 나이가 추가로 제공된다. 이러한 면에서 이 계보는 5장에 등장했던 셋의 계보와 비슷하다. 이미 5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추가 정보가 상세하게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이 계보를 통해 진행된 것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 계보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역시 마지막에 등장하는 데라와 그의 자손들이다(11:27-32). 그의 자손들 중에 바로 아브람이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 저자는 이 계보를 데라의 세 아들들에 대한 언급으로 마친다(26절). 데라는 70세가 된 이후에 아브람, 나홀, 하란 등을 낳았다. ‘데라’는 우상을 섬기는 자였다는 것 외에는 별로 주목할 것이 없다(수24:2). 본절에 기록된 데라 아들들의 이름의 순서는 노아의 아들들과 같이 나이 순서에 따라 된 것이 아니다(10:1). 나홀이 하란의 딸 밀가와 결혼한 것을 보면 나홀이 하란보다 어렸음이 분명한 것 같다. 또한 아브람은 32절과 12:4을 기준으로 볼 때 데라가 130세 때 낳은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데라가 70세에 낳은 아들은 하란이며 그가 맏아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노아의 세 아들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부상하는 셈이 제일 먼저 언급되었던 점을 감안할 때, 데라의 세 아들들 중에서 아브람이 가장 유력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리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
정답)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
5. 데라의 아들 아브람이 아내 사래와 함께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기 전 머물러 살았던 곳은 어디입니까?(31절)
31절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 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 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해설) 아브람은 어디 사람이었는가? 성경은 그가 ‘갈대아 우르’에서 왔다고 한다(28절).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곳은 하란이다. 그리고 그는 가나안 땅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 데라 역시 가족들을 거느리고 이미 우르로 떠나 가나안 땅을 향해 가던 중이었다(31절). 그러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하란에 멈추었다. 혹시 병을 얻게 되어 더 이상 여행을 할 수 없었던 것일까? 어쨌든 데라와 가족들은 하란에 정착하게 되었고, 아브람만 아내 사래와 조카 롯을 거느리고 가나안으로 떠났다. 그렇다면 아브람이 받은 소명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단순히 아버지 데라에게 이미 주어졌던 것이 위임된 것은 아닐까? 창세기 저자는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 사람이라는 것을 의도적으로 상기시키고 있다. 또한 11:27-32는 아브람이 우르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그의 아버지 데라가 살아 있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 그러나 저자는 이미 11:32에서 그의 죽음을 언급함으로써 마치 아브람이 소명을 받았을 때 데라가 죽은 것처럼 읽혀지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벌써 죽은 다음에 아브람에게 주시는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12:1)는 명령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그의 몫으로 돌아올 유산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벌써 하란에 정착해서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자에게 ‘네가 난 곳을 떠나라’라는 명령은 어떤 중요성을 지니는가? 과거를 완전히 정리하고 새로운 곳으로 떠나 정착할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그러므로 아브람은 가나안으로 이주한 뒤 다시는 고향을 찾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아들 이삭의 아내를 찾을 때에도 종을 보냈을 뿐 그의 아들은 가나안 땅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했다.
아브람을 훗날 포로가 되어 강제로 정착하게 된 바벨론을 떠나 가나안으로 귀향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형(type) 으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바벨론은 벌써 바벨탑 이야기를 통해 암시된 적이 있다. 바벨탑이 무너지면서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다. 훗날 갈대아는 행성장 신 바벨론 제국의 일부가 된다. 아브람은 지금 바벨론에서 나온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렇다면 아브람은 바벨론에서 탈출하는 모든 사람의 모형이 된다는 학자들의 주장이다.
정답) 하란 데라는 나이가 많아 긴 여행을 오래 할 수 없었다. 그는 하란에서 잠시 지체하다가 원기를 회복하지 못하고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생각하기> 烏合之卒(오합지졸)의 뜻은 까마귀가 모인 것처럼 질서 없이 모인 군중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이 없다면 우리 또한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입니다. 창세기 1장 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라고 천지창조의 상황이었습니다. 혼돈의 상황에서 말씀으로 빛을 만들기 시작하여 질서를 잡아가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11장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자 했을 때 하나님은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무질서의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은 무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하나님의 한 사람을 선택합니다.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의 선택 또한 무질서의 세상에서 질서를 잡기 위함입니다.
<적용하기> 1. 답답한 혼란스러운 삶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 단기간의 계획을 세워보십시오.